MY MENU

보도자료

제목

"신라촌락문서는 통일신라초기 695년것…'처(妻)' 서체가 증거"

작성자
정보간사
작성일
2017.05.04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755
내용

윤선태 동국대 교수, 목간학회 발표회서 '695년설' 거듭 주장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신라촌락문서'는 통일신라시대 지금의 청주 부근인 서원경(西原京)의 촌락 경제 상황을 기록한 문화재다.

가로 58㎝, 세로 30㎝ 크기의 두 장짜리 문서에는 4개 촌락의 명칭, 구역, 인구, 노비의 수, 말과 소의 수, 토지의 종류와 면적, 과실나무의 수 등이 자세하게 정리된 귀중한 유물이다. 신라촌락장적, 민정문서로도 불리는 이 문서는 현재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나라(奈良)현 도다이지(東大寺) 경내에 쇼소인(正倉院)에 있다.

신라 촌락의 실상을 알려주는 이 문서의 내용은 우리말로 번역돼 소개됐으나, 제작 시기를 놓고는 695년설과 755년설, 815년설 사이에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신라촌락문서. [윤선태 교수 제공]

 

이 중 통일신라 초기인 695년설을 제시했던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지난 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목간학회 정기발표회에서 신라촌락문서에 있는 '아내 처(妻)' 자의 서체를 근거로 다시 695년설을 주장했다.

그는 앞서 1995년 발표한 논문에서 신라촌락문서에 '1월'(壹月)이라는 글자가 있는 점을 바탕으로 755년설과 815년설을 부정하고 695년설을 새롭게 제시했다.

7∼8세기에는 1월을 '정월'(正月)로 표기했는데, 695∼700년에만 정월을 11월로 옮겨 '1월'(壹月)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는 것이 주된 논거였다.


신라 금석문의 '아내 처' 자 비교. [윤선태 교수 제공]

 

윤 교수는 이번 발표회에서는 '처' 자가 오늘날과 달리 '일 사(事)' 자 아래에 '여자 녀(女)'가 붙어 있는 형태인 점에 주목했다.

일본 역사학자 하타다 다카시(旗田巍)가 1959년 논문 '신라의 촌락'에서 형태가 이상하다고 의문을 제기한 글자이기도 하다.

윤 교수는 6세기 신라 비석인 울주 천전리 서석(525년, 545년)과 단양 적성비(550년 추정)에는 '아내 처' 자가 신라촌락문서와 같은 모양이지만, 8∼9세기 비석인 감산사 미륵조상기(719년)와 감산사 아미타조상기(720년), 흥덕왕릉 비편(872년 추정)에서 발견되는 '아내 처' 자의 서체는 오늘날과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라촌락문서와 같은 형태의 '아내 처' 자는 중국에서 수나라(581∼618) 때까지만 사용됐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신라도 8세기를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아내 처' 자만 쓴 것 같다"고 말했다.

신라촌락문서의 695년설을 재확인한 그는 "문서에서 인구 구성상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인 노공(老公, 60세 혹은 70세 이상으로 추정) 아래에 제공(除公)이라는 연령층이 있는데, 이 제공이 유난히 적다"고 지적한 뒤 "660∼670년대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으로 많은 남성이 목숨을 잃은 영향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출처:연합뉴스 2017년 1월 5일



0
0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