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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여나성 백제시대 명문석 발견(한국고고학회 홈페이지)

작성자
노무현
작성일
2012.06.09
첨부파일1
추천수
0
조회수
374
내용

문화재청(청장 김 찬)이 허가하고 (재)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원장 정광용)에서 발굴조사 한 부여나성 청산성구간 3차조사에서 백제시대 웅진~사비기의 석비가 발견되었다.

문화재보존센터에서는 부여군으로부터 부여고도보존사업의 일환으로 부여나성 발굴조사를 의뢰받아 나성 정비·복원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2011년부터 나성 중 청산성구간(사비도성의 동북모서리)에 대해 현재까지 3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나성의 성벽은 기존 조사와 마찬가지인 내탁식(內托式, 외면은 큰 돌로 쌓고 그 안쪽에 작은 돌을 넣어 채우고 다시 그 위쪽에 흙을 다진 축성법)의 토석혼축 성벽으로 축조됨을 확인하였고, 체성 내부의 토축부에서 한성말~웅진기의 유물만이 확인되어 성벽의 축조가 사비천도 이전인 웅진기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1차 조사의 성벽 내측부에서 통일신라 초기의 석실분이 확인되어 나성의 폐성 시점 또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금번 확인된 명문석은 성외측 성벽 보호시설인 부석층 내에서 다른 판석형 할석들 사이에서 노출되었다. 때문에 명문석은 비로서의 용도가 폐기된 후 이 시설층의 석재로 재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석시설은 판석형의 할석을 점토와 함께 성외벽을 따라 깐 시설로, 성벽 외부에 마련된 순심로(巡審路)나 낙수 등에 의한 성벽 보호 시설이며, 나성이 폐성되기 이전에 설치된 시설물이다.

명문석은 화강암을 장방형을 띠게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길이 53cm, 폭 26cm, 두께 10cm 정도이며, 모든 면에서 인위적인 손질의 흔적이 보이며, 전면부와 측면부는 편평하게 다듬어 전면부에 글씨를 음각하였다. 정확한 글자 수는 알 수 없으나 2행 8자로 추정되며 육안으로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1행 3번째 ‘立’과 2행 첫 번째 ‘上’ 정도이다.

명문석 출토 이후 서체 및 관련 전문가를 통해 명문을 판독한 결과, ‘立’과 ‘上’의 경우 다수의 의견을 모았고 1행의 4번째와 2행의 4번째의 경우 각각 ‘此’와 ‘造’로 보는 의견이 있었지만 글자의 새김이 얕고 마모가 심해 더 이상의 판독은 불가능 했다. 그리고 ‘立’과 ‘上’ , ‘辶’에서 파책(波磔, 한자의 서예 운필법의 일종)의 흔적이 확인되어 서체 발달상 5C 초 이후의 예서(隸書)체로 판단되며, 명문석의 크기가 남조척(南朝尺, 1척의 길이가 25cm 정도)으로 보면 길이 2척과 폭 1척의 기준으로 만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부여 북나성 명문석’은 비록 명문이 소략하고 판독도 미미하여 부여 나성과의 연관성 혹은 제작년도, 내용 등은 알기 어려우나 남조척의 척도에 맞게 표석(標石, 어떤 것을 표지하기 위하여 세우는 돌)으로 제작되고, 삼국시대 중기 정도에 유행한 예서체로 글자가 새겨진 점 그리고 석비가 발견된 고고학적 층위가 백제시대 층이라는 점 등을 통해서 명문석이 웅진~사비기에 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현시점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명문석이 출토된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며, 추후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져 백제 금석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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