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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반 신라는 ‘강한 법치국가’ 였다
 
정보간사
 
234
 
2017-05-04 18:38:27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 성산산성서 발굴된 목간 공개

강구열 기자           

 

 

“진내멸 촌주가 두려워하며 미즉이지 대사 앞에 삼가 아룁니다.” 지방 관리인 ‘촌주’(村主)가 중앙에서 파견한 ‘대사’(大舍)에게 보고하는 태도가 지극히 공손하다. ‘농포’(?怖), 즉 두려워한다는 표현을 쓴 것에서 엄격한 위계를 읽기가 어렵지 않다. 촌주는 자신이 법률 적용을 잘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사적 67호) 발굴에서 나온 사면목간이 증언하는 6세기 중반 신라의 한 풍경이다. 대사와 촌주의 관계, 촌주의 고백에서 당대 신라의 어떤 면모를 읽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시 이 지역에서 백제와 대립했던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56자가 쓰여진 사면목간은 신라가 율령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6세기 중반 신라의 강력한 법치
 

사면목간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성산산성 17차 조사(2014∼16년)에서 발굴한 23점의 목간 중 가장 눈길을 끈다. 길이 34.4㎝, 두께 1㎝의 나무를 사각으로 깎아 56자를 써놓았다. 진내멸 지방의 촌주가 중앙 출신 관리에게 올린 보고서 형식의 글로 법 집행을 잘못한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농포’라는 단어가 우선 눈길을 끈다. 형식적인 표현일 수도 있으나 보고서에 두려워한다는 표현까지 쓴 것은 6세기 중반 신라가 중앙의 지방 지배를 체계적으로 만들어 놓았음을 보여준다. 보고를 받은 ‘대사’는 ‘경위’(京位·신라 중앙정부의 관등체계로 17등급으로 구분) 12등급에 해당하는 자리로 오늘날 지방 군수 정도에 해당한다.

‘법삼십대’, ‘육십일대법’ 등을 언급하며 법률 적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30일, 60일이라는 기간을 명시해 놓은 법률 용어인데 목간에서 촌주는 앞서는 60일 대법으로 하였는데, 지금 30일을 적용해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연구소는 “6세기 중반의 신라시대 법률인 율령(律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며 “당시 신라는 율령이 강조되는 법치주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신라는 법흥왕(재위 514∼540)이 520년 율령을 반포했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은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기존에는 효력이 크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번에 출토된 목간으로 그렇지 않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당시 갈등을 벌이던 백제에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해석했다.  

◆조세 수취 체계 보여주는 하찰목간 

지금까지 발굴된 목간은 1239점이고, 이 중 308점이 성산산성에서 나왔다. 고려시대 이후의 것을 제외한 고대 목간(668점)으로 좁혀 보면 성산산성 목간의 비중은 더욱 높아진다. 성산산성이 최대 목간출토지인 셈이다. 하지만 보고서 형식을 띤 사면목간은 3점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하찰목간’이라고 불리는 화물표 성격의 것이다. ‘어디에 사는 누가, 어떤 물건을, 얼마 보낸다’는 내용을 ‘촌락명+인명+물건+수량’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연구소 최장미 연구사는 “(목간을 통해) 확인된 지명은 ‘삼국사기지리지’에 보이는 신라의 상주(尙州) 지역의 범위 안에 있었다”며 “대체로 낙동강의 수계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수운을 활용해 물자를 제공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성산산성과 주변 촌락 사이에 오고 갔던 물건은 피나 쌀, 보리 등의 곡물과 철 등으로 조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목간에는 조세를 바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는 신라 사회가 조세 수취 대상자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만큼 강력한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출처:세계일보, 2017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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