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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이 日에 선물한 책보에 숨겨진 문서… 삼국통일 후 세상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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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6) 신라촌장적의 세상 


문서의 유래와 연도

어느 해인가 신라 왕은 일본 왕에게 화엄경론 65권을 책보에 싸서 선물했다. 책보는 포(布)의 겉과 안에 종이를 붙여 만들었다. 1933년 일본 정창원(正倉院)은 이 책보를 수리하기 위해 포와 종이를 분리했다. 그때 천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신라의 문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4개 촌의 인구, 가축, 전답, 나무 등을 조사한 행정문서인 ‘신라촌장적(新羅村帳籍)’이었다. 4개 촌은 웅천주 관하의 3개 촌과 서원경 관하의 1개 촌이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청주시 초정리, 연기군 남면, 전의군 일대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신라촌장적은 그 내용의 풍부함이나 독특함으로 인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대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한국 고대사 연구는 이 문서의 올바른 이해를 목표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적의 연도는 간지로 을미년(乙未年)이다. 이를 두고 종래 815년이란 해석이 유력했는데, 윤선태 교수가 695년으로 바로잡았다. 윤 교수는 화엄경론이 정창원에 입고된 시기를 추적해 그 같은 결론을 얻었다. 필자도 695년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전에 소개한 삼국의 지배체제가 장적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구려와 신라는 개별 연(烟)이 다수 결합한 세대복합체 호(戶)를 몇 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그에 기초해 취락과 촌에 공동 부담의 과표를 부여했다. 바로 그 세대복합체 호와 공동부담의 과표가 장적에 공연(孔烟)과 계연(計烟)으로 드러나 있다. 다음 회에서 소개하겠지만 722년 신라는 정전제(丁田制)라는 토지제도를 시행했다. 이후 세대복합체의 공식 명칭은 정호(丁戶)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장적에 나타난 공연은 722년 이전 시대의 용어일 수밖에 없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출처:한국경제신문 2018,06,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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