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을 제물로…1600년 만에 밝혀진 신라인의 풍습
[출처: 중앙일보] 사람을 제물로…1600년 만에 밝혀진 신라인의 풍습
경북 월성 유적지서 유골 2구 발굴
성벽 쌓으며 사람을 제물로 바쳐
설화로만 전해진 인신공양 첫 입증
이종훈 소장은 “설화로만 전해온 신라인의 인신공양 풍속이 고고학적으로 처음 입증됐다”며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은 신라인의 인신제의가 1600년 만에 밝혀진 셈”이라고 말했다.
월성 성벽은 흙으로 만든 토성(土城)이다.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는 기술로 축조했다. 인골은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초층에서 출토됐다. 한 구는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있고, 또 다른 한 구는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게끔 얼굴과 한쪽 팔이 약간 돌려진 상태로 발견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형태다. 외상(外傷) 흔적도 없었다. 크기는 각각 166㎝, 159㎝다.
인골은 5세기 전후의 것으로 판단된다. 머리 주변에 남은 나무껍질을 방사선탄소연대 측정한 결과다. 또 인골 발치에는 당시 제작된 작은 항아리 3개와 컵 모양 토기가 놓여 있었다. 성벽 또한 5세기에 축조해 6세기에 최종 보수한 사실이 확인했다 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학예실장은 “별도의 매장시설이 없어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며 “인골이 나온 지층이 습한 편이라 보존상태가 양호하다”고 말했다.
대규모 토목공사에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습속은 고대 중국 상(商)나라(BC 1600~1000)에서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주(人柱) 설화로 전해졌다.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 세우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편찬한 『고려사』 충혜왕 4년(1343)에 ‘왕이 민간의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는 말이 돌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에서 사람을 제물로 썼다는 문헌기록은 현재 없다. 다만 이번 발굴로 그 개연성이 커졌다. 2000년 국립경주국립박물 유물터에서 거꾸로 처박힌 어린아이의 유골이 나와 인신공양설이 제기됐고, 신라를 대표하는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에밀레종)에도 아이를 넣어 주조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종훈 소장은 “후세 사람들이 역사를 기술할 때 신라인의 풍속을 누락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소그드인(이란계)으로 추정되는 터번을 쓴 토우(土偶·흙인형)도 새로 공개됐다. 신라와 페르시아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그간 월성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파서 만든 못)에 여러 형태의 토우가 출토됐지만 이란계 인물 토우가 나온 건 처음이다. 6세기 것으로 경주 다른 고분에서 나온 유사 토우보다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르다.
경주=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사람을 제물로…1600년 만에 밝혀진 신라인의 풍습
2. 경경주 월성 성벽서 인골 출토…제물 추정 '첫 사례'
경주 월성 정밀발굴조사 중간 조사결과 발표
약 1500년 전 제물로 묻은 인골 인골 2구
기록만 남은 '인주설화' 고고학적으로 확인
페르시아풍 토우·역사적 가치 입증 목간도
주거지 혹은 성벽의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하는 습속은 고대 중국에서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를 통해 ‘인주(人柱) 설화’(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에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설화)에 대한 유언비어가 항간에 돌았다는 기록만 전해져왔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연구소는 “이번 발굴로 설화가 사실임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셈”이라고 말했다.
연구소는 2015년 3월부터 진행 중인 경주 월성 정밀발굴조사의 중간 조사결과를 통해 인골 발굴 사실을 공개했다. 인골은 5세기 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서쪽 성벽 기초층에서 발굴됐다. 연구소는 인골 1구는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있었고 또 다른 인골은 얼굴과 팔이 다른 인골을 향해 있었다고 밝혔다.
인골의 얼굴 주변에서는 나무껍질이 부분적으로 확인됐다. 연구소는 두 인골이 결박이나 저항의 흔적 없이 곧게 누운 점으로 미뤄 사망 이후 묻힌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인골이 출토된 서쪽 성벽은 이번 조사로 5세기께 처음 축조돼 6세기께 최종적으로 보수됐으며 문이 있던 자리는 유실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현재는 발굴된 인골을 대상으로 성별·연령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체질인류학적 분석과 DNA 분석, 식생활 복원을 위한 콜라겐 분석 등을 진행하고 있다. 연구소는 “당시 사람들의 다양산 생활상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월성 북쪽 해자에서는 독특한 모양의 토우(土偶, 흙으로 빚은 사람 형상의 인형)가 나왔다. 토우는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허리가 잘록해 보이는 페르시아풍의 긴 옷을 입고 있다. 연구소는 “당나라 시대 호복(胡服)이라고 불린 소그드인(중앙아시사에 살던 이란계 주민)의 옷과 모양이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성의 역사적 가치를 입증하는 목간도 발굴됐다. 새로 발굴한 목간은 모두 7점이다. 그 중 하나에서 ‘병오년’(丙午年)이라는 글자를 확인했다. 법흥왕 13년(526) 혹은 진평왕 8년(586)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신라시대 유적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곰의 뼈, 산림청이 희귀식물로 지정한 가시연꽃의 씨앗, 손칼과 작은 톱 등으로 정교하게 만든 얼레빗이 월성 해자에서 발견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주 월성은 제5대 파사왕 22년(101) 축성을 시작해 신라가 망한 935년까지 궁성으로 쓰였다. 지난해 3월까지 진행한 1년차 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와 흙으로 빚은 벼루조각 50여점이 출토됐다. 연구소는 “신라 천년 궁성인 월성의 체계적 복원을 위한 철저한 고증연구와 학술 발굴조사를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3. 경주 월성 해자에서 발굴된 '목간'
(서울=뉴스1) -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6일 경주 월성 해자에서 병오년(丙午年) 간지가 정확하게 적힌 '목간'이 발굴됐다고 전했다. 이들 목간을 통해 목간 제작 연대와 해자를 사용한 시기,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 유력자를 통해 노동력을 동원?감독했던 사실,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吏讀) 사용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병오년'이라고 적힌 목간은 월성해자 출토 목간 중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것으로, 병오년은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법흥왕13년(526년)이나 진평왕8년(586년)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문화재청 제공) 2017.5.16/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