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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공대사碑 잃어버린 파편 발견(연합뉴스-김태식기자)

작성자
노무현
작성일
2012.02.02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438
내용
진공대사碑 '잃어버린' 파편 발견

동양대박물관 발굴..비문 온전 복원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고려 왕조 교체기 선종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계나 정치권 동향, 그리고 당시 서예사 연구에 제1급 보물로 꼽히지만 비문 일부가 깨져 나가는 바람에 해독에 애를 먹은 경북 영주시 비로사(毘盧寺) 경내 진공대사 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가 거의 온전하게 복원될 수 있는 길을 열렸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비신(碑身) 파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동양대박물관(관장 노대환)은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毘盧峰.해발 1천439m) 남쪽 자락 중턱에 위치한 비로사 경내 정비를 위해 지난 5월26일부터 이 일대 약 190㎡ 범위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모두 182자가 새겨긴 진공대사 보법탑비의 비편을 찾아냈다고 11일 밝혔다.
진공대사 보법탑비는 신라 문성왕 17년인 855년에 태어나 고려 태조 20년인 937년에 향년 83세로 입적한 진공대사라는 선승의 공적을 기려 그의 입적 2년이 지난 뒤인 태조 22년(939)에 왕건의 명으로 완공됐으며, 비문은 최언위가 완성하고 글씨는 이환추(李桓樞)가 썼으며 이를 최환규(崔煥規)가 돌에다 새겼다.

이번에 발견된 비문 파편은 길이 61㎝에 폭 57cm, 두께 20.5cm로 15줄에 걸쳐 모두 182자가 새겨져 있다.
조사단은 현존하는 진공대사비 비신이 높이 206cm이며 왼편 하단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이번에 발견된 파편은 떨어져 나간 곳과 아귀가 꼭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비문 전체의 텍스트 구성으로 보면 이 파편은 비문 후반부의 결실된 부분에 해당한다.

비편이 발견됨으로써 진공대사가 생전에 김해와 소백산에 머물면서 대중을 교화하는 모습이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났으며, 아울러 931년과 937년에 각각 태조 왕건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 그리고 입적 시기와 비석을 세우게 된 과정, 대사를 추모하는 사언절구체 추모 명(銘)이 더욱 확실하게 밝혀졌다.

노대환 박물관장은 "그간 학계에서 진공대사비 판독과 해석 작업을 진행했으나 결실된 부분이 많아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면서 "그러나 이번에 182자를 새로 보충함으로써 비문 내용 파악을 물론 나말여초 선종 및 선사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진공대사비는 상단부를 비롯한 일부 구간에서만 글자가 훼손됐을 뿐, 전체적인 모습을 복원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 전망이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로까지 건축 시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건물터 2개 동이 확인됐으며 이 무렵 연화문 수막새와 당초문 암막새 조각 여러 점과 청동으로 만든 동물조각상 1점이 아울러 수습됐다.

자료출처 -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진공대사 보법탑비는 신라 문성왕 17년인 855년에 태어나 고려 태조 20년인 937년에 향년 83세로 입적한 진공대사라는 선승의 공적을 기려 그의 입적 2년이 지난 뒤인 태조 22년(939)에 왕건의 명으로 완공됐으며, 비문은 최언위가 완성하고 글씨는 이환추(李桓樞)가 썼으며 이를 최환규(崔煥規)가 돌에다 새겼다.

이번에 발견된 비문 파편은 길이 61㎝에 폭 57cm, 두께 20.5cm로 15줄에 걸쳐 모두 182자가 새겨져 있다.

조사단은 현존하는 진공대사비 비신이 높이 206cm이며 왼편 하단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이번에 발견된 파편은 떨어져 나간 곳과 아귀가 꼭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비편이 발견됨으로써 진공대사가 생전에 김해와 소백산에 머물면서 대중을 교화하는 모습이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났으며, 아울러 931년과 937년에 각각 태조 왕건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 그리고 입적 시기와 비석을 세우게 된 과정, 대사를 추모하는 사언절구체 추모 명(銘)이 더욱 확실하게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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