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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복암리 목간, 백제 지방관 동향보고 문서?(문화일보 최영창기자)

작성자
노무현
작성일
201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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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0
조회수
650
내용
나주 복암리 목간, 백제 지방관 동향보고 문서?

백제학회, 목간 3점 첫 공개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 나주 복암리 출토 백제 관등명 목간 1면(오른쪽)과 2면의 적외선 사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지난 2004년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백제 의장왕 증손녀 태비 부여씨 묘지’에 대한 내용이 발표돼 관심을 끌었던 백제학회(회장 양기석) 제1회 정기발표회(15일 충북대 인문대 시청각실)에서 최근 출토된 백제 목간 3점이 처음 공개됐다.(문화일보 11월14일자 27면 참조)

이날 처음 공개된 백제 목간 3점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범)가 지난 2006년부터 발굴해온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 주변 제철(製鐵) 관련 수혈(竪穴)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에서 올해 출토된 것으로, 백제 16관등 중 제4~6위의 관등명이 보이는 목간 ▲백제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오선)이 충남 부여 쌍북리 백제 도로 유구와 인근 건물지 유구 주변에서 확인한 백제 사비시대 행정조직인 22부 중 하나인 ‘외경부(外?Z部)’명(銘) 목간과 일본에서 제첨축(題籤軸)이라 부르는 ‘여□(與□)’명 인덱스 목간 등이다.

이와 함께 이미 공개됐던 쌍북리 출토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목간에 대한 진전된 판독도 소개됐다. 이로써 지금까지 출토, 확인된 백제 목간은 66점으로 늘어났다.

◆ 나주 복암리 출토 백제 관등명 목간 = 김성범 나주문화재연구소장이 이날 처음 공개한 목간은 윗부분은 둥글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든 주걱 모양이다. 맨 아랫부분은 부러뜨려져 있으며 잔존길이 29.4㎝,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가 4.5㎝, 두께 0.9㎝다. 집수(集水)시설로 추정되는 수혈 유구에서 출토된 여러 점의 목간 중 하나로 이 중 두 점은 지난 7월 발굴현장에서 공개된 바 있다.

이날 세 번째로 공개된 목간은 1면과 2면 모두 3행씩 각각 26자와 32자의 묵서(墨書·붓글씨)가 있는데, 이 중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1면 20여자, 2면 27∼28자 정도다. 김 소장이 제시한 묵서의 판독은 1면 1행은 ‘×□年自七月十七日至八月卄三□(×□년자칠월십칠일지팔월입삼□)’, 2행은 ‘□ 毛羅(□ 모라)’, 3행은 ‘×半(?)那□高石?人來(等?)□□(×반(?)나□고적인래(등?)□□)’이며, 2면 1행은 ‘×尤(?)戶智淚(?) 前巷奈率烏胡?(×우(?)호지루(?) 전항내솔오호치)’, 2행은 ‘×夜之閒徒 鈞(?)非頭(頌?)?率麻進(×야지한도 균(?)비두(송?)한솔마진)’, 3행은 ‘×□得□□?b次 反(取?)德(?)率(?)□(×□득□□국차 반(취?)덕(?)솔(?)□)’이다. 1면 1행은 7월17일부터 8월23일까지 일어난 뭔가를 기록한 문서임을 보여준다.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3점의 백제 관등명 목간에 이어 백제 16관등 중 제4~6위의 관등명인 덕솔(德率)·한솔(?率)·내솔(奈率·나솔로도 읽음)이 나타나고 부여 궁남지 출토 ‘서부후항(西後巷)’명 목간에 이어 두 번째로 ‘항(巷)’이 표기된 목간임이 2면에서 확인된다.

김 소장은 ‘전항내솔오호치’에 주목, 내솔 오호치가 ‘항’을 관칭(冠稱)한 최초의 백제 귀족이 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목간의 내용을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동향을 보고한 문서로 추정한 김 소장은 ▲내솔·한솔 등 6품 이상으로 은화관식을 착용한 관리가 복암리 고분군 주변에 거주했고 ▲토제 벼루 등이 함께 출토된 것을 볼 때 지방에서 목간이 작성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지방 도시에서도 5부(部)와 5부 아래 둔 행정구역인 5항제가 실시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밝혔다.

반면 이날 토론을 맡은 윤선태(역사교육) 동국대 교수는 복암리 출토 목간이 ‘제철’과 관련된 목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재 구리 제련시설 유적인 나가노보리(長登) 동산(銅山)유적에서 출토된 8세기 전반 목간과 비교한 판독을 제시했다.

목간의 묵서를 연결시켜 한문 문장으로 해석한 김 소장과 달리 윤 교수는 2면 1~3행 앞쪽의 ‘□호(□戶), 지차(智次·淚를 次로 판독), 야지(夜之), 한도(閒徒), 국차(?b次)’ 등은 작업조원으로, 뒤쪽의 내솔·한솔·덕솔 등 백제 관등을 가진 사람들은 이들의 동원을 책임진 사실을 기록한 장부 목간으로 해석했다.

◆ 부여 쌍북리 출토 목간 = 중국 사서인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 나오는 내관(內官) 12부, 외관(外官) 10부 중 하나인 ‘외경부(外?Z部)’명 목간(8.1×2.3×0.6㎝)은 문헌 기록에 나오는 내관 12부의 실체를 말해주는 초유의 자료다. 박태우 백제문화재연구원 연구실장은 ‘외경부철 대면십량(外?Z部鐵 代綿十兩)’으로 묵서를 판독한 뒤 ‘외경부에서 철의 대가로 지방에서 가져와 창고로 거둬들인 면 10량의 포대에 붙여져 있던 꼬리표(하찰·荷札)’로 해석했다.

백제시대 환곡 또는 이자놀이를 했음을 보여주는 ‘좌관대식기’ 목간과 관련, 박 실장은 ‘인명(人名)+대식(貸食)+상(上·상환한 것)+미(未·아직 상환하지 않은 것)’의 체제로 기술된 목간을 백제 무왕 17년(618년) 외경부에서 곡물의 출납과 관련 있는 문건으로 이해했다. 특히 토론자인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무왕 13년과 17년 홍수와 지진이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시, 당시 이같은 재해와 관련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원곡과 이자를 받은 상황을 기록한 문서일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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